김동원의 해설이 있는 시

4월<3>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jinak 2016. 4. 21. 13:46
  • 4월<3>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삽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우리는 이 땅의 수많은 여인들 중 평생 고독한 시심과 고뇌 속에 살다간 한 여류 시인을 기억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존재에 대한 끝없는 물음과 해답을 쫓으며 시대의 격동기에 잘못 휘말려 뜨겁게 불타버린 한 마리 암사슴을 안다.
    그린 듯 짙은 눈썹과 큼직한 서러운 눈매가 너무나 수수하고 고귀하던 그 아름다운 처녀를 기억한다.
    노천명! 저 서해 기막힌 노을이 참으로 황홀하다는 몽금포를 낀 황해도 장연에서 1912년 태어났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근원을 애틋하게 그려낸 저 위대한 명시「사슴」을 누군들 잊을 수 있으리. 한 마리 사슴이 되어 어찌 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산을 바라보는 그 처녀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천명의 시에서 한 여성의 독특한 고독과 사색과  슬픈 자아 상실의 세계가 음울한 노래로 들리는 것은 천명 시의 근저에 흐르는, 일찍 죽은 어미에 대한 그녀의 사무친 그리움에 기인함이리라.
    아마 시인 천명이 가장 살고 싶은 이상향의 모습 역시, 한국의 누이 같은 시「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속에 그려진 정경일 것이다. 1938년 첫 시집『 산호림 』에 수록된 2연 14행의 이 시는 시인의 수수한 인생관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목단과 들국화가 핀 우리의 산야를 떠올리면, 가을 아침 시골의 들판과 초가지붕과 근처 연못의 물안개가 한 편의 서정시처럼 펼쳐진다.「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속의 그 좋은 두 사람은 어쩌면, 어린 날 천명이 남몰래 사모하던 고향 마을의 소년과 들국화 머리에 꽂고 꽃목걸이 꽃반지를 하고 암소의 잔등 위에 올라 풀피리 불던, 소녀 천명이 아닐까.
    1957년 한(恨) 많은 생애를 접은 시인의 시 속엔 어쩐지 ‘라’와 ‘시’음이 가득히 퍼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이름없는 여인이 되어」는 인생살이에 시달려 세상사 부귀영화도 다 버리고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지극히 평범한 한 남자를 따라 무위자연이 되고자 하는 한 고독한 처녀의 순결한 본성 같아 왠지 모를 뭉클함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몸을 갖고 나온 노천명. 어린 날 경기(驚氣)가 들어 죽을 몸이 천명(天命)으로 살아났다 하여 붙여진 슬픈 사연의 이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천명의 시를 사랑한다. 한국 소녀와 처녀와 여인의 원형을 천명의 시만큼 고스란히 지닌 시도 드물 것이다.


     

     

    <해설가>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