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양계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내가 중학교 1학년 경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대구로 가셔서 병아리 100여 마리를 사오셨다. 노란 색이 나는 새끼 병아리들, 예뻤다. 아버지는 헛간에서 노란 병아리들을 돌보는데 정성을 다하셨다. 그런데, 100마리 모두가 며칠 만에 죽어버렸다. 아버지는 낙담하지 않으셨다. 추운 겨울날 곰곰이 책을 보면서 연구하셨다. 여기 저기 전화를 하시는 모습도 보였다. 아버지는 다시 대구로 나가셔서 병아리 100여 마리를 사오셨다. 이번에는 병아리들이 무탈하게 매일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헛간을 개조해 만든 창고에 가서 병아리가 이제 어엿한 닭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바닷가에서 자란 내가 닭을 처음 본 것은 염장 큰집에서였다. 여러 마리의 닭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소쿠리에 가보면 계란이 두세개 들어있기도 했다. 횟대라는 것을 두어서 닭이 그 위에 올라가서 자기도 했었다. 이렇게 큰 집에서 벌로 스쳐보았던 방목하던 닭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양계라는 대량생산의 형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자 병아리는 닭 벼슬이 생기고 몸집이 커지며, 점차 어미 닭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얼마 더 지나자 조숙한 닭이 조그만 달걀을 낳았다. 내가 가장 먼저 그 닭이 낳은 계란을 보았다. 보고를 하자 가족들이 모두 뛰쳐나와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아버지는 케이지라고 불린 닭장을 사와서 닭을 모두 케이지에 넣었다. 조금 있으니까 한 마리씩 계란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하루에 10개씩 20개씩 산출이 늘어가면서 대량생산이 되었다.
어머니는 시장에 계란을 가지고 가서 파셨다. 소문이 나서 우리 집에 계란을 사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계란은 보통계란의 두배는 되었다. 이 계란은 특란이라고 하여 값을 더 받았다.
아버지는 밤에도 불을 켜야 산출이 많다고 하면서 닭장에 전기시설을 하셨다. 병이 돌지 않도록 소독같은 것도 맡아서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케이지 앞에 놓인 모이판에 사료와 물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 형과 나는 닭의 배설물을 1주일에 한번씩 치우는 일을 맡아했다.
내가 맡았던 일 중에서 하기 싫어했던 것은 영해로 가서 닭사료를 사오는 일이었다. 영해에서 통학차에 사료를 싣고 축산항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이것을 다시 리어커에 싣고 와야 했다. 사춘기라서 그랬던지 여학생들을 의식해서인지, 이 일을 하기 싫어해서 아버지한테서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집은 닭을 300마리 가까이 키우게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했던가... 우리 집 닭들이 매일 낳아주는 계란은 우리 남매들 영해까지의 통학비와 용돈으로 사용되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전 해보시지 않았던 양계를 해보기로 생각하셨을까? 아버지의 페인트 일은 주로 여름과 겨울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한명씩 중학교에 진학하자, 매일 매일의 교통비와 잡비라도 마련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양계는 한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성공적이었고,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약 6년 동안 300마리 양계는 우리 집의 생계에 큰 효자노릇을 하였다. 아버지의 본업은 여름에 집중되는 페인트일이었다. 가을철인 9월, 10월, 11월 3개월 동안의 오징어 건조에다가 일년 지속되는 양계가 더하여져 우리집 대식구들은 굶지 않을 수 있었다.
양계는 가족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5남매들은 이런 협업을 통하여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계란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서 생기는 한푼 두푼 돈의 귀함, 근로의 신성함을 내가 알게 된 것도 양계를 통해서 얻었던 큰 수확의 하나였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이미 45년, 40년 전의 일이다. 바로 낳은 달걀을 손에 넣었을 때 전달되는 그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이 지금도 나의 손끝에 남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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