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영남권) 영덕 사람들

김동원 시인, ‘문장21’ 2020년 봄호 평론 당선

jinak 2020. 5. 5. 11:22



 

영덕 출신의 김동원 시인이 종합문예지인 계간 문장21’ 2020년 봄호 평론에 당선되었다.


김동원 시인의 <문장, 모가 나도 슬프지 않은-예경해의 시와 세계>는 무엇보다 풍부한 독서 체험과 디테일한 분석, 컨텍스트성(contextuality)에 대한 이해와 비평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수행되었으며, 예경해 시집 누고?(2019, 그루)를 대상으로 그의 시가 갖는 주제와 방법론에 대해 분석주의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작품의 주제와 사상이 어떻게 시의 방법론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밝히며, 몇 개의 소주제를 통해 논의의 체계와 편의성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서정과 현실의 상반된 논리가 비평적 담론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어떻게 하면 작품의 의미와 성과를 잘 드러낼 것인가, 그리고 이를 간명한 언어와 문체로 드러내고자 고민하고 탐색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평을 받았다.


김동원 시인은 당선의 기쁨이 큰 만큼, 내게 있어 좋은 비평과 시론에 대한 열망과 고민이 한층 깊어졌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문장, 모가 나도 슬프지 않은

예경해의 시와 세계

 

김동원


프롤로그-서정시와의 술래잡기


 

무릇 세상 만물은 무엇인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어 우는 법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한유,송맹동야서)라는 말이나, 궁핍한 연후에야 절창이 나온다詩窮而後工(구양수,매성유시집서)는 말은 사실 장자의제물론(“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窺怒號 대지가 쉬는 숨을 / 바람이라 한다. /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고요하지만 / 바람이 불면 세상의 모든 구멍이 세차게 운다.)”에서 비롯된다.


시는 울음이다. 바람과 구멍이 만들어낸 마음의 상처이자 풍경이며, ()의 감수성이자 상상이며 에너지다. 그랬을 때 예의 불평은 반드시 불안함과 곤궁함일 필요는 없다. 울음이 비분강개의 울음일 이유도 없다. 마음의 평정이 깨어진 모든 상태 즉, 환희와 슬픔, 열락과 분노가 모두 불평이다. 그리고 발산되는 모든 동작으로서 파안대소나 외침, 절규와 발 구르기, 글쓰기가 모두 울음의 범주에 속한다. 하여 슬픔을 통해 슬픔을 치유하는 또 다른 곡비(哭婢)가 시인이다.


좋은 울음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사람이 소리를 내어 남들에게 좋게 들리고, 좋게 들려 글로 표현되며, 글로 표현되어 정도(正道)에 합치된 것이 다름 아닌 좋은 울음이다(참조. 이규필,좋은 울음). 이 경우 좋은 울음(善鳴)은 전통시가에 있어 최고의 경지인 중화(中和)에 속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의 울림 / 진리 자체가 인간들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파울 첼란)가 아닐까.

 

서정은 눈물과 경험의 방울로 이루어져 밑도 끝도 없는 슬픈 빙하다. 첫사랑의 흰 눈이자 이별의 눈보라다. 아득한 천 길 벼랑이 서정시의 미적/실존적 거리라면, 서정시는 그리움의 시간이자 외로움의 공간이다. 태을(太乙)의 집이다. 유한의 언어로써 무한을 꿈꾸는 모험이다. 서정시는 감정의 두레박에서 건져 올린 기억의 언어 놀이다. 몸을 가진 인간의 한계와 초월이다. 파괴와 창조다. 서정시의 운명과 형식은 다시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발산하고 수렴하는 검은 빛이다. 밝은 어둠이다. 그리고 서정시의 촉수는 바람의 악기로 직조된 소리에 닿아 있다. 천지간 무늬와 선율로 그려낸 그림이다.


서정시는 구멍이다. 아니, 신명이다. 지극(至極)에 이르는 범종 소리다. 서정시는 환()이다. 잠깐, 허공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복사 꽃빛이다. 꽃빛 너머 감춰진 비바람이다. 서정시는 밭두렁 가에 핀 가을 억새의 흔들림이다. 지문이다. 생사(生死)의 그림자다. 이처럼 다양한 비유의 언어와 이미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서정시는 우리의 오랜 지인(知人, Hausfreund)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주체와 타자()

 

 

누고?는 예경해의 첫 시집이다. 그에게 시는 아침 까치소리이거나 그림자’(시인의 말)와도 같이 뭔가 숨기는 게 많은 봄() 언어에 비견된다. 혹은 허공에 빈 발자국 소리이거나 신기루마냥 잡힐 듯 잡히지 않는”(신기루) 추상적인 아름다움이다. 하면서도 마디마디 숨긴 속울음”(쌍골대금), “주름 깊은 어미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는 솔방울들”(옹이), “말없이 어둠을 밀어내는 소리 없는 함성(으로서) 세상을 흔드는 꽃” (촛불)처럼 구체적인 이미지로서 생의 대한 의지와 욕망으로 드러나 있다. 말하자면 서정과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기억 속의 시간과 장소를 소환하여 사라져가는 고향의 풍물과 정취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하여, 예경해의 시집 누고?는 바람의 리듬과 천지간의 무늬와 역()의 상징을 통해, 한바탕 서민들의 노래를 질탕하게 부르고 있다. 30년 마주 쳐다보고 웃는 부부간의 허허로운 두 얼굴에서 시가 빛나는가 하면, 헐렁헐렁해진 것들의 뒤축으로 은유된 가족의 정()이 오롯하다. 차마 못 버리고 안고 사는 어머니의 냉장고를 뒤져서 시를 찾는가 하면, 경상도 사투리 시 속의 그 투리(透理)의 시학과 욕설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의 시는 여인의 갈피 속에 찍힌 맨살의 기척이자, 그 기척 끊어지고 나서야 꺾어진 의 아픔을 내장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예경해가 추구한 세계는 전통과 현대, 서정과 현실, 서민(의 말)과 향토적 정감, 문명과 자연, ()과 해학 등을 역설과 사이의 시학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에게 시를 처음 가르쳐 준 것은, 시인의 고향 마을에서 보았던, 천 년 은행나무(천년기념물 301)의 그 장엄(莊嚴)함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앞 천변 들풀 위에 불던 봄바람과 여름 달빛 냇가에서 동무랑 멱을 감던, 까까머리 소년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그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생애의 그늘을 시로 씻어내었다. 무작정 언어를 데리고 여항(閭巷)과 저잣거리를 휘저으며 시를 적었다. 까마득히 잊고 살던 고향 산천을 기억의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서정시를 낳는다.

새벽에 혼자 깨어 흰 종이 앞에 고요히 앉아서, 선시(禪詩)를 관()하기도 한다. 하여 그의 시는 종횡무진이다.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저것에 가있고, 저것을 말하는 가하면, 이미 그것 너머를 관통하는 시힘이 있다. 예경해는 격물(格物)을 통해 치지(致知)를 추구하고, 옛것을 통해 새것을 묻는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참으로 잘 익은 술 향기가 난다. 때로는 근심을 잊게 하고, 때로는 도도한 시흥(詩興)으로 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진다. 그러다가도 아래 작품에서 시인은 경상도 사투리로 일갈한다. 대체, 누고?’


안동 김 씨 종갓집 손녀딸

할아버지 사랑 독차지하며 자라

공부 잘해 서울 일류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설 추석 명절 이왼 거의 내려올 틈 없는 손녀

겨울방학 끝날 무렵

사촌들과 찾은 할아버지 댁, 문안드리는데

이놈은 영창이, 조놈 영숙이, 근데 야는 누고?

정작 당신 손으로 키워 온 친손녀는 못 알아보신다

저예요 할부지!

눈데?

저 영지예요

 

요모조모 뜯어보며 갸우뚱하시는 할아버지

얼굴이 바뀌어도 너무 달라진 손녀

와 이리 빈했노?

할부지! 지 손 좀 살끔 댔니더, 요즘 성형이 유행이잖아예

할아버지 노발대발

지 부모가 준 몸 저기 머꼬?

불호령, 대들보가 들썩인다

쫓겨나듯 혼자 밖으로 나온 그녀

이웃 동네 늘 예뻐하시던 고모 집으로 가는 도중

만난 마을 친구들도 그냥 획 지나간다

대문 들어서는데 초인종 소리에 나오신 고모님

누고?


―「누고?전문

 

예경해의 시 누고?를 분석하기 전, 이 시에 나타난 주된 어법으로서 사투리(지역어, 방언)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 표준말이 사회 전반을 점령한지가 오래인데, 현대에 사투리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대시사에서 방언의 시학과 활용은 매우 다양하게 확인된다. 소월과 백석의 북방 방언, 영랑과 미당의 남도 방언, 이정록의 충청도 방언, 김광협의 제주 방언, 그런가하면 박목월과 정숙, 그리고 상희구의 시에서 엿볼 수 있는 경상도 방언 등 부지기수다. 사투리에는 아무래도 가족적이고 토속적인 정감이 있다. 말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친근한 사투리는 수천 년 그 지형과 기후에 따라 지역민이 터득한 고유한 언어이다.

시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면 사물 간의 미세한 감각의 차이를 참으로 다양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은 시 행간의 움직임과 동작 등에 기묘한 느낌과 풍부한 뉘앙스를 감칠맛 나게 드러낸다. 표준어로는 도저히 사투리 시의 행간의 어조, 속도, 고저, 음색, 장단, 강약 등의 독창적인 말맛을 버무려내지 못한다.


그렇다. 인용시 누고?는 사투리의 말맛이 각별한 데가 있다. 여성의 성형을 통해 근대적 시선과 현대적 시선의 겹 이미지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 시의 정황은, 부모가 물려준 얼굴에 손을 댄 불경스러움에 대한 질책이다. 그러나 심층엔, 전통과 현대의 시선을 구획 짓는 역설의 어법이 절묘하다. 근대의 시선은 그랬다. 여성은 남성보다 성적으로 열등하고 약한 존재로, 늘상 피해자였다. 조건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것이 당시 여성의 역할이었다.


예경해는 성형이란 시적 소재를 통해 이를 해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시대성을 관통하고 있다. 종가 집 할아버지의 물음은 전통적인 가치에 기반한 낯선 것, 새로움에 대한 거부와 통한다(“이놈은 영창이, 조놈 영숙이, 근데 야는 누고?”). 관습의 틀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남존여비사상으로 고착된 조선 유교는 성차별의 주된 근거로 자주 지목된다.

이런 이유로 여권 신장은 제도적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으며, 사회 쟁점으로 부각된 지 오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억압 구조는 현대에 와서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기회 균등이나 사회적 지위 획득이 상당 부분 완화되거나 해소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여성의 당사자인 고모조차 대문을 들어서는 조카의 얼굴을 몰라보고, 할아버지는 누고?”라고 되묻는다. 다시 말해 예경해는 이 시를 통해, ‘전통과 현대 사이의 경계를 묻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익명성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실존의 문제, 낯익은 주체가 갑작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타자()otherness의 문제, 그리고 현대시와 삶의 조건으로서 꿈길이든 어디든 숨통을 조(이는, 그렇다고 어디) 숨을 데도 없” (자객에 깔렸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패러독스(Paradox)의 시학

 

 

1954년 작가 정비석(1911~1991)은 장편소설 자유부인을 통해 간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서울신문 연재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도덕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던 전후의 불안정한 사회윤리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게 된다.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난 주부가, 다시 뉘우치고 가정으로 복귀하는 단순한 스토리였지만, 그 당시로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 역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당시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후 간통은 고소를 통해 협박이나 위자료를 받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종종 TV 드라마에선, 경찰이 증거 수집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남녀가 있는 모텔을 급습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간통죄는 2015126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법적 효력이 상실되었으며, 201616일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가 간통죄 폐지의 이유였다. 여기서 시인은 왜, 낡은 간통 문제를 건드린 걸까? 작품을 보자.

 

그래도 깁기만 하면 멀쩡하데이

조금만 낡고 싫증나도 버리는 옷가지처럼

멀쩡한 남편 그냥 쓰레기통에 던지는 마침표 세상

구멍 나거나 해져도 꿰매면 번듯한데

기울수록 서로 부둥켜안아 더 단단해지는 줄 모르고,

부부싸움 하고 쪼로록 울며 달려온 딸,

엄마 내 도저히 못살겠데이

저 웬수덩어리 바람까지 났데이

흠 하나 없는 사람 어데 있노

들꽃이라도 눈물 없이 피는 줄 아나

혹독한 가뭄도 삭풍 발길질도 참고 또 참는 기데이

너거 아부지 봐라

한때는 병나발 불고 개구신 지기도

숭숭 구멍 난 그림자 바느질해 노이

집안 곳곳 얼매나 야물딱지게 맹글었노

양말이건 부부 사이건

좀 흠이 있다고 보기 싫다고

한번 깁거나 해보지도 않고

그냥 훌쩍 내버리면 안됀데이

새기라고 다 좋나

심장 콕콕 찌르는 쉼표 같은 어머니 말씀

서러움의 순간들 일렁이고 멀미나는데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얄미운 바람


―「마침표는 안됀데이전문

 

정말일까. 시 속 화자인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말리는 것처럼, 바람난 남편은 구멍 나거나 해져도 꿰매면 번듯해지는 것이. 참고 살면기울수록더 단단한 부부 사이로 돌아갈까. 도박과 한 번 난 바람은, 죽을 때까지 못 끊는다고 하던데. 이혼만이 살 길은 아닐까. 근데,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여자, 혼자 아이들은 잘 키울 수 있을까. 당장 생계는 어떡하지. 주변인들의 손가락질과 꼴 시린 눈초리는 접어두고라도, 이 나이에 취업은 될까? 도장 한 번 찍으면 만사가 다 해결될까.

화자의 말처럼 흠 하나 없는 사람, 세상에 존재나 하는 걸까. 이혼 후 준다던 생활비를 만약 안주면, 생고생은 누가 하나. 그래도 아이들 아버지인데, 꾹 참고 살까 말까. 날밤을 세워가며 이혼을 부정하고, 긍정해도, ‘(여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직 질문 뿐, 막막한 현실의 절벽은 그대로일 것이다

 

근대 여성의 결혼관은 아닌 게 아니라, 참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였다. ‘마침표이혼만은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하여, 그 집 귀신으로 남아야 무덤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근대의 마침표는, 마침내 끝났다는 것을 알려 주는, 여성에겐 하나의 조종(弔鐘)을 의미했다.

이혼의 낙인(烙印), 개인과 그 사회로부터 가차 없이 존재가 부정되었다. 아니, 끝장을 의미했다. 하여,‘이혼녀의 삶은, 지옥보다 더 한 참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교의 남존여비를 알기에, 화자인 친정어머니는 집으로 달려온 딸에게 애걸복걸한다. “너거 아부지 봐라 / 한때는 병나발 불고 개구신 지기도 / 숭숭 구멍 난 그림자 바느질해 노이 / 집안 곳곳 얼매나 야물딱지게 맹글었노라며, 억지 춘향격이다.

이 시의 표면적 주제는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 세대에 대한 비판일 수 있겠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숨겨진 패러독스가 개입되어 있다. 근대 남성의 바람은 결국, 현대 여성의 이혼 광풍을 불러 왔다. , 간통죄의 종언은, 남녀 간의 사랑을 극지로 내몰고 있다. 하여, 예경해는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얄미운 바람끼를 통해, 남성들의 비윤리적 자가당착의 의표를, 역설적 시법으로 단칼에 찌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달빛-파리의 비유와 상징


 

가장 좋은 시는 시로 사는 것이다. 아니, 온몸으로 시를 먹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오는 것, 수동적 종합의 세계다. 하여 신이 집힌 언어가 시의 고갱이다. 시는 말도 안 되는 것이, 말이 되기도 하는 장르(genre). 얼마나 비유가 적확하냐에 따라 시의 운명은 결정된다. 예경해는 번쩍, 하는 놀라운 시적 발상이 예사롭지가 않다. 특히, 그는 시를 직유 같은 매화 눈초리, “연꽃같은 상징으로, “늪 속에 두 발 담가 꼼짝 않는반달의 비유를 통해, 밤이면 밤마다 애간장 녹이는 시를 찾아 헤맨다. 달빛 단칸방날지 못하는 파리, 그런 비유의 정점을 찍은 수작이다.


우선 두 작품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신하다. 난삽한 시어가 없다. 투명한 날 이미지의 감각이 빼어나다. 그런가하면, 시적 사유의 전개가 치밀하면서도 해학적이다. 말의 조리가 매력적이다. 사물 속에 숨은 신을 찾는 능력이 놀랍고 관능적이며, 진실의 세계에 닿아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가독성과 흡인력이 높다. 그리고 사물을 해석하는 안목과 통찰력이 크게 돋보인다. 이는 달리 말해 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드는(defamiliarization) 기법과 상상력이 출중하다는 뜻이다. 먼저, 달빛 단칸방을 읽어 보자.

 

달빛 때문이었지,

오갈 데 없다고

뽀얀 얼굴에 착해 빠져 보이는 친구가

곁이라도 좀 내어달라고 통사정하길래

정 많은 게 탈이지, 달빛 단칸방 하나 비워 내주었지

은근 슬쩍 누님! 누님! 하면서

사랑한다나 뭐라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더니

갑자기 허벅다리 막 파고드는 거야

힘은 장사지 당할 수가 있어야지

알고 보니 완전 철면피에 날강도인 거야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게

이 밤() 저 밤 휘저으며 곳간 세간 다 들어먹고는

안방 떡하니 차지하고 되레 주인 행세하는 거 있지

달빛 때문이었지,

밀쳐내도 꿈쩍 않지, 환장하겠더만

지독한 놈한테 몸도 재산도 다 뺏기고

빈 몸으로 길거리 나앉을 수밖에

우리 동네 가 봐 그런 여편네 쫙 깔렸어

만신창이 쭈그러진 몸으로 눈물바다야

셋방 아무한테나 내주다 클 나


―「달빛 단칸방전문

 

우선, 달빛 단칸방은 제목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흔히 제목은 텍스트라는 현에 이르는 관문(玄關)이자, 내용을 규정한다. 사람을 만나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얼굴이듯, 시의 제목은 그 사람의 첫인상과도 같다. 인상적인 제목은 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특히 시제가 부여하는 생각과 느낌이 더욱 오롯하고 매력적이면 그만큼 시의 독자들을 오래 사로잡을 수가 있다.

제목은 시 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제목을 처음부터 부여하든 나중에 부여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제목을 어떻게 설정할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할 뿐이다.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달빛 단칸방달빛단칸방이란 하나의 시적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서로 다른 유사성을 통찰하는 은유의 기법이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이 밤() 저 밤 휘저으며밤알을 먹어치우는 밤바구미 벌레의 이야기다. 그것을 남녀 간 성()의 유희로 의인화시킨, 시의 착상이 독창적이다. “달빛 단칸방, ()과 벌레가 애정 행각을 벌리는 장소이자, 시적 파토스다. ()을 여성의 몸으로, 벌레는 밤을 파먹는 남성으로 이미지화 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우리 동네 가 봐 그런 여편네 쫙 깔렸다는 대목은 백미다. 쭈글쭈글한 밤 껍질을, 남자에게 온통 다 털린 빈털터리 여성으로 의인화한 점은, 발칙하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하여, 달빛 단칸방의 가장 큰 매력은, 삼류 애정 행각을 밤과 밤바구미를 빌어, 해학의 차원으로 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다음은 날지 못하는 파리를 살펴보자.


뒷간에 수시로 퍼붓는

비를 맞는다

머리에 쏟아지는 뜨끈한 비

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준다

까마득한 벽

날마다 기어오르지만 늘 그 자리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불안이 내리누르는 뒤통수,

간질거려도 겁이 나 뒤돌아볼 수 없다

꼿꼿한 자세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고집

벽에 머리 박고 죽은 체 한다

등보이며 부둥켜안은 벽

날지 못하는 죄, 늘 두드려 맞는다

다가서는 그림자, 정조준 영점사격 한다

치명적 비밀 알까 고개 돌리지 못하고 타깃이 된다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집요한 공격 따가운 등허리

더러운 악취 속 미동도 않은 채 견디는 벽

떼어내려 해도 죽은 둥 살 둥 악착같은 파리*

오르지 못하는 벽 누가 뭐라든 붙들고 있다

훨훨 나는 꿈꾸지만,

까마득한 절벽 매달려 허덕이고 있는 나


―「날지 못하는 파리전문

 

* 남자화장실 소변기에 과녁처럼 그려진 파리


한국문학의 미적 범주에서 해학(humor)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이는 좁게는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를 지닌 농담이나 표현들을 가리키며, 넓게는 사회적 사건이나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해학은 주어진 사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과장하거나 왜곡하거나 비꼬아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한다. 비슷한 개념의 풍자가 특정 인물을 공격하려는 비판적인 의도가 담겨있다면, 해학은 억압받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를 향한 시선에 연민을 갖게 하여 친밀성을 높인다. 선조들의 일상생활이 녹아있는 마당극이나 판소리, 소설 등에서 자주 드러나며,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적 표현을 통해 기쁜 상황은 더욱 유쾌하게 만들고, 슬픈 상황은 웃음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해학은 또 교훈적인 메시지를 은근히 숨기는 데도 쓰였으며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효과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


예경해의 날지 못하는 파리는 좁은 의미의 해학에 속한다. 한때 파리를 맞추려고 아랫도리에 힘을 주곤 하던,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때마다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예경해의 이 시는, 그런 남성의 성()문화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소변기에 과녁으로 그려진 파리를 통해 까마득한 절벽 매달려 허덕이고 있는” ‘소시민들의 힘든 삶을 표현하고 있다. ‘파리는 높은 자와 가진 자의 타깃이 되는 공격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죽은 둥 살 둥엎드려 지내야하는, 일상인들을 대변한다. 어쩌면, ‘파리는 제 꿈을 이루지 못한 시인의 자화상이자, 평범한 우리들의 슬픈 초상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의 괴리는 어느 시대 어느 개인에게서나 존재하는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가 아닐 수 없다.

 

 

욕설과 카타르시스


 

욕 중에도 패악발악은 인간 사회의 막장을 약여하게 보여 준다. 욕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욕을 먹어도 싼 인간들이 차고 넘친다. TV와 인터넷은 욕설과 막말 공화국이다. 욕도 꼭 할만한 자리에 하게 되면, 십년 먹은 화증이 다 풀린다. 욕설이 난무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 제발, 욕이라도 먹게 해서, 정신 차리게 좀 해줘라고 발버둥치는 신호다. 모든 시대와 역사 속에서 나온 욕설은, 그 시대 인들의 살려달라는 구조 신호다. 대표적인 담시가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아니던가. 이는 우리의 전통적 민중문학 양식을 탁월하게 계승하면서 이를 통해 1970년대의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 비판한, 해학의 시이자 욕설의 카타르시스다. 예경해의 욕쟁이 할머니, 이 시대에 , 욕이 필요한지아주 질펀하게 사투리로 그려내고 있다

 

대구 칠성동 샛골목 허름한 닭개장 국숫집

옹이진 세월 푹 고아 우려낸 매운맛 일품

이노무 자슥아!

사내 자슥이 모가지 왜 시래기 좆같이 해가 댕기노

고개 좀 똑바리 못 해가 댕기나

걸쭉한 입담 국수 맛을 더하는 욕쟁이 할머니

청양고추 마늘에 감칠맛 나는 욕 한 바가지 버무려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먹는 얼큰한 국수

지붕 들썩히는 욕에 무너질 것 같은 집인데도

욕먹으려는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골목

염병할 놈들!, 빌어 묵을 놈들!”

썩을 놈! 너거끼리 다 해쳐 무라

눈꼴사나운 세상 겨눈 시원한 욕지거리

혼자 된 딸뿐인 할머니,

체면은 무슨 체민이고

줄라카거던 빤쭈 벗고 선하게 주고

물 때는 넥꼬다이 팍 풀어 제끼부리고 확 쳐무라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무심한 듯 애정 어린 욕 한 사발

기분 좋게 배가 불러 온다

저승사자도 기겁해 도망갈 거침없는 입담

, 이 씨불알놈들아 욕 좀 더하고 간다 안 카나


―「욕쟁이 할머니전문


카타르시스는 원래 의학용어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6장 비극 편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는 비극을 관람하는 것은, 관람자가 배우의 정서들을 대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심층적이며 거대한 고통에 대한 예술가들의 모방은, 청중의 가슴에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추방하고, 더 나아가서 관객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발전시켜 인간의 공격성과 분노의 감정을, 예술을 통해서 현저히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본다. 욕설은 원래 나쁜 것인데도 이 시에 나타난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은, 서민들의 분노를 정화시킬 뿐 아니라,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뚫어 준다.


왜냐하면, 이 욕설이야말로 염병한 놈들!, 빌어 묵을 놈들!” 썩을 놈들을 향한, 서민들이 내뱉고 싶은 억눌린 감정이기 때문이다. 예경해는 배운 놈들, 가진 놈들, 높은 놈들이, 다 해쳐 먹는 이 더러운 세상을 향해, 욕쟁이 할머니의 입을 빌려, 이 시대의 서민 풍속도를, 풍자와 해학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셈이다. 저승사자에게 퍼붓는 마지막 입담은, 생의 막바지를 지나온 늙은 여인의, 삶의 대한 애정 어린 욕 한 사발일 것이다.“, 이 씨불알놈들아 욕 좀 더하고 간다 안 카나욕도 이쯤이면, 욕경(?)에 속하지 않을까. 혹은 무심(無心)의 사회학 같은.

 

 

죽음의 두 장면과 풍경


 

인간-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그것은 곧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예경해 시집 누고?의 중요한 테제 중 하나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의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이자 둘이다. 죽음은 몸 밖에도 있고, 몸 안에도 있다. 누구나 찰나가 오면 생사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옛날에는 상을 당하면, 7일장, 5일장, 3일장을 치렀다. 죽음 치레도 그 사람의 생전 지위에 따라 달랐다. 장례식은 상여를 만들어 마을 사람이 매고 상제들은 그 뒤를 따라 장지로 갔다. 상복은 상중에 있는 상제나 복인이 입는 예복으로 옷감은 거친 마포로 만들었다. 소매는 넓게 하고 가슴 왼편에는 눈물받이를 달았다. 허리에는 삼띠를 둘렀다. 머리에는 굴건을 쓰고 대나무로 만든 상장을 짚었다. 여자의 상복도 거친 마포로 만들었다. 기혼자는 머리에 흰 족두리를 쓰고, 미혼자는 머리띠만 둘렀다. 남자가 죽으면 행상(行喪), 여자가 죽으면 꽃상여를 태운다.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만장(輓章)을 앞세우고, 상여를 맨 채, 앞 상두꾼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뒤 상두꾼이 받아 넘기던, 그 만가(輓歌)의 울림은 구슬펐다. 그 때는 적어도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에 대해, 절통한 데가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 동네 여자들은 꽃가마 타고 시집와 꽃상여 타고 하늘로 들었다. 뒷산으로 가던 꽃상여의 풍경은, 지금 생각해 봐도 아름다운 슬픔 혹은 비애의 미학이다. 현대는 죽음의 순간도 파탄이지만, 화장의 뒷처리는 훨씬 시니컬하다. 고령화와 가족 해체와 맞물려, 자살과 고독사는 다반사이다. 속도와 자본의 시대는 삶도, 죽음도, 간단치가 않다. 하여, 우리는 묻게 된다.‘어떻게 살 것인가를 지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깊이 숙고하게 된다. 예경해의 햇빛요양원 205호실촌놈두 편의 시는, 나날이 천박(淺薄)해져 가는 사람살이의 마지막 죽음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네모난 부두에 정박한 고장 난 배 여섯 척

온통 하얀 돛배다

들어오면 바다로 나갈 수 없는 배

어제만 해도 건너다보며 추억 만지다 잠들었는데,

몇몇은 밤새 파도에 떠밀리어 갔는지 텅 빈 자리만 남았다

한 달이면 되겠지 했는데

1년 가고 3년 지나도 고칠 곳은 자꾸 늘어나

삼키는 수리비만큼 점점 지쳐가는 몸과 마음

고물 값 욕심에 건성건성 들락거리던 발길도 뜸한

헤어날 길 없는 극지의 배

하루가 천 리,

아는지 모르는지 빈자리 나면 또 채워지고

움직이지 않는 배

세월만 갉아먹고 있는 지도 어언 6

오지 않는 막내 걱정에

하얀 하늘에 그리다 만 수채화

하루에도 수없이 녹슨 눈으로 그렸다 지우는

김해 김씨 할머니


―「햇빛요양원 205호실전문

 

햇빛요양원 205호실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여섯 명의 늙은 여자들이 누워 있다. “네모난 부두에 정박한 고장 난 배 여섯 척으로 은유된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하얀 시트 위에 누운 고장 난 몸은 온통 하얀 돛배다” “들어오면 바다로 나갈 수 없는 배병실이란 그렇겠다. 그 앙상한 뼈들이 실존해 있는 햇빛 요양원 205호실의 뒷문은, 저승이겠다. 간 밤몇몇은 밤새 파도에 떠밀리어 갔는지 텅 빈 자리만 남았다그 한밤 중 가릉거리는 늙은 몸뚱어리들의 가래 끓는 소리는, 적막했겠다.

한 달이면 되겠지 했는데 / 1년 가고 3년 지나도 죽지 못한 들의 수리비, 공포였겠다. 자식도 손주도, 적막도 찾지 않는 감감 무소식의 병실. “헤어날 길 없는 극지의 배”, “움직이지 않는 배”, “김해 김 씨 할머니의 움푹 괸 두 눈은, 죽음 직전까지 눈물이 고였겠다. 아래 소개할 시 촌놈, 근대 부모상과 현대 자식상의 비정한 충돌이자, 현실의 갈등 현상의 한 축이다.

 

잘 모시겠다고 아파트 팔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는 아들 내외 통사정에

정리한 걸 몽땅 다 주고 믿고 지낸 노부부

며느리 방에 볼일 있어 들렀다가

우연히 보게 된 펼쳐진 가계부 글씨


촌놈 용돈 2만원


무너지는 하늘, 그 날로 그 집에서 나왔단다

오갈 데 없어 폐지 주우며 살게 된 곳

두 사람 누우면 달빛 한 움큼 앉을 옥탑 방

팔순 노부부 손잡고 죽어 해골이 되었단다


날개 꺾인 채 생살 갉아먹는 서러움 부둥켜안고

슬픔마저 바짝 엎드린 감옥 같은 방

살아온 삶 얘기하듯 가지런히 정돈된 옷가지

수도꼭지 잠그듯 생을 잠갔단다


아들딸 자식 소식 먼지만 쌓인 지 오래,

집주인도 우편배달부도 그냥 바람이었을 뿐

아무도 몰랐던 덩그러니 버려진 주검

장례비로 남긴 3백만 원 돈 봉투 곁엔,

영정사진 속 두 부부가 웃고 있었단다


―「촌놈전문

 

촌놈을 읽고 있으면, 어딘가 통절한 데가 있다. 요즘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불과 수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패륜이요, 경악이다. 부모를 갖다 버리는 일은, 자식을 갖다 버리는 일만큼, 이제 다반사다. 서로가 서로에게 폭행과 감금, 심지어 토막살해까지,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도()를 넘었다. 역사 이래 인간 삶에 빠지지 않는 명제 중 하나가 행복에 대한 담론이다.


인간 수명은 유한하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보다 행복을 움켜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선사시대와 석기, 청동기와 철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투쟁과 전쟁의 한복판엔 더 많이 가지려는 물질적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맹목적 행복 추구가 현대에 와서 온갖 반문명적 방향으로 치닫고 있어 그 패악이 심각하다.


예경해는 촌놈을 통해 가족애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덕목임을 역설로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절제와 이성을 넘어 이미 혼돈과 무절제의 위험 수위까지 치달은 황금만능주의는, 가족 해체는 물론, 국가의 존망을 걱정할 만큼 눈앞에 와 있다.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 육체적 쾌락, 기계문명에 대한 맹신(盲信), 돈을 신()으로 모시는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 되었다.

잘 모시겠다고 아파트 팔고 /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는 아들 내외 통사정, 이길 부모가 있을까. 그렇다고 촌놈처럼, “정리한 걸 몽땅 다 주고나면, 천덕꾸러기가 된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행태가 아닌 가. ‘촌놈 용돈 2만원며느리 가계부에 적힌 글을 보았을 때, ‘노부부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인은 하늘이 무너졌다고 표현하였다. “옥탑방에 두 손을 꼭 잡고 굶어 죽은 노부부, 우리 시대 우리 부모의 자화상이요, 통곡의 벽이다.


 

걸레-, 혹은 화엄에 이르는 길


 

예경해의 이번 시집 누고?에서, 가장 은유적이고 놀라운 비약의 선적(禪的) 작품을 들라면,화엄세계를 꼽을 수 있다. 무시간적 입장에서 보면, 세계의 존재 방식인 연기(緣起), 서로 동화하고 드나들며(相卽相入),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重重無盡).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다. 이것이 사사무애(事事無碍). , 법계연기(法界緣起)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이다. 하여,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화엄의 골수다.


비틀고 쥐어짜고

방망이로 두들겨 맞는다고 날 무시하지 마라

한때는 내 인생도 비까번쩍했지

이젠 털 다 빠지고 너덜너덜 만신창이 됐지만

깨끗한 몸이었을 땐

걸레 같은 인생을 생각이라도 했을까

이젠 숙명이다 생각하고 헐렁하게 산다

모자란 듯 남이 가기 싫어하는 곳 어디든지 다 가보니

이런 인생도 괜찮더구만

수건이 걸레 됐다고 측은해 하지 마라

어둡고 더러운 이 세상

내가 안 닦으면 누가 닦겠어

어느 스님이 날 보고 그러데

걸레, 니눔이 화엄 세계니라!


―「화엄세계전문


선시(禪詩)의 하나로서화엄세계는 시의 묘처에 속한다. 선시란 무엇인가? “이면서 이 없는 것이 , 이면서 가 없는 것이 이다.”(석지현). 하여, 선시란 언어 이전도 아니요, 언어 이후도 아니다. 의 세계는 아무리 비틀고 쥐어짜도, 걸레처럼 자재(自在)하다. 누가 방망이로 두들겨 때린다고 해도, 걸레는 묵묵부답이다. 화엄의 세계에선 색즉시공이자, 공즉시색이다. 깨끗한 몸도 없고, 걸레 같은 몸도 없다. 에 나타난 언어의 비약과 파격의 수사법은 역설이자, 자가당착이다.

남가기 싫어하는 곳 어디든지 가고, 수건이 걸레 되고, 걸레가 수건 되는 세계가 이다. 선시는 불가능한 사실의 열거를 통해 초월적 은유의 세계로, 곧장 치고 들어간다. 모순된 표현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교접시킨다. 이런 어법은 시적 대상에 상상력의 자유와 초월적 인식을 보여준다.‘자 화두(無字話頭) 같은 선가(禪家)의 공안(公案)이 그 대표적 비약이다. 물음의 띠를 비틀어 역설의 답으로 꼬아 붙인 간화선의 화두가 그렇다. 어둡고 더러운 세상도 없고, 밝고 맑은 세상도 없다. 걸레 속에 이미 물음과 답이 숨어 있고, 내가 안 닦으면 누가 더러운 세상을 닦겠는가. 도덕경 제1장 첫머리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의 세계와도 비견한다.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요, 이름을 부르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 ’걸레는 스스로의 몸이 이자, 화엄 세계 그 자체이다. 예경해는걸레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더러운 인간들의 욕망을 대신 닦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지구는 허공을 맨 날 천 날 닦는 거대한 걸레이다. 아니, 이 우주 자체가 큰 걸레이다. 걸레는 상극을 버리고 상생을 추구하는 화엄의 극치이자, 주관과 객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이원구조를 부정한다. 하여, 음양의 갈등이 아니라 태극의 조화를 추구한다.‘둘로 나뉘지도 않고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는, 無二而 不守一의 화엄사상은, 그 자체로 삼라만상을 닦는 거대한 걸레이다.“어둡고 더러운 이 세상 / 내가 안 닦으면 누가 닦겠어”. 가장 비루하고 낮은 사물에서 피어나는 꽃이 세상을 밝히는 법이다.“돌아보면, / 다 거기가 거기” (거기가 거기)라는 시인의 깨침은 절묘하다.

 

에필로그-문장은 모가 나도 슬프지 않다

      

지금까지 예경해 시의 주제와 방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타자와 기억, 죽음과 일상의 문제가 환기하는 심리와 현실을 구체적으로 획득하면서 서민 의식에 근거한 비판정신과 향토적 정서에 기반한 방언의 효과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시인과 방언의 경우 사방 세계의 비밀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리고 해학과 역설의 미학, 비유와 상징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는 시의 세계가 크게 돋보였다. 말하자면 그는 먼 것들의 세계와 사물의 본질을,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 기적처럼 펼쳐 준다.

욕쟁이 할머니를 매개로 민중들을 등쳐먹는썩을 놈들을 풍자하는가 하면,밀린 숙제에서는 아내의 능청을 통해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타자 간에 가로 놓인 현존의 문제를 뒤섞음의 이미지를 통해, 폭탄주로 형상화시키는가 하면, 도둑이란 시에서는 노인의 치매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기도 한다. 보름달에서는 팔순 어미에게 못 다한 불효를 자책하기도 하고, 옷장의 은유를 통해 첩년 신세의 고달픈 생을 밀도 높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시선 일여(詩禪一如)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 그의 시에 나타난 서정과 현실은 현상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나 모호함이 아니라, 부정(不定)과 모순의 세계를 한 축으로 꿰차고 있다. 꽃 피는 순간의 황홀함이나 저잣거리에서 보여 지는 죽음-풍경이 그 중 하나이다.


서정시는 시간의 주름이다. 사물이 인간에게 건네는 신령한 말이자 예언이다. 서정시인 예경해의 언어의 촉수는, 사고와 감정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세밀함이 돌올하다. 리드미컬하면서도 산뜻한 이미지로 드러난 그의 시에는 아픈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흰 그늘이 있다. 빛과 어둠을 통과한 자만의 울음소리가 있다.

서정시의 요체는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놀라운 직관과 통찰 그리고 치열한 자각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경해의 시와 현실은 권력의 전횡에 눌려 핍박받는 민중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있으며,‘을 위해 허공에 집을 짓는 거미의 삶을 통해, 민초들의 신산고초(辛酸苦楚)를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시상 전개가 활달하고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표현 방법이 느껴진다. 문명화된 현대의 삶에서 갈수록 소외되어 가는 노인들의 불안 의식, 고향과 가족애에 대한 휴머니티가 이번 시집에 무르녹아 있어, 예경해의 시적 역량은 물론, 오랜 내공과 탐색의 시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지구는 한 편의 서정시다. 서정시의 세계와 무늬는 천상을 향한 동경-그리움(sehnsucht)에 있다. 시공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물과 풍경, 그리고 인간은 환()이다. 환각이 낳은 은유와 상징의 존재이다. 자연은 빛과 색, 소리와 향기를 통해 사물의 본질과 실재를 드러낸다. 예경해가 이번 시집 누고?에서 집요하게 추구한 세계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인다. 감각과 마음, 소통의 문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서 그의 서정은 장기를 발휘한다.

이제 시인은 새롭게 전개될 다음 작품에 대해,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인이란 누구이며, 새로운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앞서 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등속의 문제에 대해 다시 고뇌할 필요가 있다. 시와 자연/현실/영혼/언어에 대한 예경해의 도저한 정신과 반란, 사랑만이 그런 미지의 세계, 불가능의 세계를 가능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말이 머물다 간 황량한 거리”(날아다니는 말)를 오늘도 걷고 있는 그는, 그의 시는 모가 나도 ... 슬프지 않다”(글모퉁이).

 

 

심사평

 

비평적 감수성과 디테일한 분석

 

문학에 있어 비평은, 작가마다 각국의 지성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답이 존재한다.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세계에 대한 언어의 구상과 추상 미학, 독시자(讀視者)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세상과 예술, 문학과 시의 대부분의 정의가 그러하듯이 단순한 단어로 명료한 정의는 간단치 않다. 학습자의 교양적 수준과 전문적 지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그 작품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특히 문학적 주제, 등장인물, 사건과 배경, 현실적 삶과의 비교 등을 통해, 작품 속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학습자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야말로, 비평 학습의 즐거움이 된다.


우리말의 경우 비평은 한자어 批評(:비평할 비, 나란히 비 / :평론할 평)에서 따왔다. 이 말의 어원은 비주평점(批朱評點)에서 온 말이다. ‘나란히 견주어 놓고 평가하거나 비판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 말은 원래 시회(詩會)에서 잘된 시구에 붉은 점을 찍는 행위에서 비롯하였다.


동양적 전통에서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에서 발전한 향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상과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잘 된 부분을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하는 방법은, 오늘날의 비평의 맥락과 유사하다. 이것으로 보아 비평은 창작된 작품을 대상으로 감상과 평가가 병행되는 작업을 뜻한다. 한편, 영어에서의 비평 Criticism, Critic에서 왔으며 그 말은 본래 그리스어 식별할 수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κριτικός (kritikós)의 어원을 두고 있다. ‘사리에 맞는 판단이나 분석을 제공하거나 판단이나 해석 또는 관측의 가치를 매기는, 사람을 뜻한다. 문학이나 학문적 맥락의 비평이란 용어는 문예비평을 의미하며 문학, 예술, 학문 등에서 미학적 목적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의미한다.

 

김수영의 글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에 의하면,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과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내용으로서 현실성과 동의어가 되고, 후자의 경우는 시적 대상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말이 된다. 하여 시인의 관심은 형식의 미학과 틀 속에서 주어지는 반면, 비평적 관심사는 시의 내용과 리얼리티의 실현에 주어져 있다. 소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과, 한 편의 작품이 전체의 틀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구조화되어 있는가. 또한 그것이 갖는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분석 파악하고, 이를 체계화하는 능력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비평적 글쓰기는 다른 유의 글쓰기와는 달리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엔 무엇보다 시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석 능력, 전체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

 

이번에 선정된 김동원의 비평적 글쓰기는 무엇보다 풍부한 독서 체험과 디테일한 분석, 컨텍스트성(contextuality)에 대한 이해와 비평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수행되어 있다. 작품론 형식으로 전개한 이번 평론(문장, 모가 나도 슬프지 않은 예경해의 시와 세계)은 예경해 시집 누고?(2019, 그루)를 대상으로 그의 시가 갖는 주제와 방법론에 대해 분석주의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작품의 주제와 사상이 어떻게 시의 방법론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밝히며, 몇 개의 소주제를 통해 논의의 체계와 편의성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서정과 현실의 상반된 논리가 비평적 담론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지나친 논리 중심의 전개와 문체는 어느 모로 거부감을 줄 수 있는데, 김동원의 경우 어떻게 하면 작품의 의미와 성과를 잘 드러낼 것인가, 그리고 이를 간명한 언어와 문체로 드러내고자 나름 고민하고 탐색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왜 예경해인가, 누고?인가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진술에 관해서다. 이 점을 좀더 유념하고 보완하게 되면 차후 우리는 한 사람의 훌륭한 비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더욱 분발하고 정진함으로써 차후 한국 평단에 큰 자취와 족적을 남겼으면 한다.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이문걸, 선용, 김철, 김종, 윤일광, 박양근, 최철훈

 

 

당선소감 / 김동원

 

시는 나의 숨은 신()이다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엘리어트). 시는 정의하는 순간 죽는다(네루다) 는 식의 말들은 시성(詩性, poeticity)이 갖는 다양한 의미망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의 작품이란 독자 수만큼의 다채롭고 새로운 의미로 재창조된다는 말이다. 수십 년 시를 써오면서 나는 ()창작과 비평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둘은 손과 손등의 관계처럼 시의 몸과 정신을 이루고 있다. 이번 응모와 관련해 필자가 깨달은 점은, 시인과 독자, 비평가가 함께 좋아하는 좋은 시론서-시비평서를 집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짐작하게 되었다. 하여, 우선 시론을 쓰기 전, 창작자의 관점에서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좋은 시의 요건은 무엇인가등등 근본적 질문을 다시 시작하였다. 시법의 여러 종류인 상징, 이미지, 리듬, 문장의 구조, 품사의 구성, 종결형의 처리, 비유 중 은유, 직유, 의인의 활용법, 시적 허용의 묘미, 제목과 첫 행, 퇴고등을 깊이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 시의 비평과 이론의 입장에서 대상주체의 개념을 보다 심화시켰으며, 언어를 통한 객관적 세계의 통찰, ‘동일성의 시학객체의 비교 분석을 통해 문맥을 정밀화하였다.


()에 있어 역설과 반어, 풍자와 해학의 관계망을 촘촘히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현대시 백년간 창작된 한국인이 좋아 하는 서정시와 현대 젊은 미래파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유파별로 섭렵, 정리하면서 시 비평과 이론의 기초를 다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텍스트의 선정과 논자의 시에 대한 문제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예경해의 시집 누고?를 통해서 통절하게 느꼈다.

 

예경해의 시집을 텍스트로 선정한 이유는, 그의 시집이 서정시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과 현실, 문명과 자연, 해학과 역설, 은유의 시학은 물론, 특히 선()의 시학이 그것이다. 하여 그의 시에는,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저것에 가 있고, 저것을 말하는 가하면, 이미 그것 너머를 관통하는 시힘이 있다. 서정시는 시간의 주름이다. 사물의 말이 건네는 계시이자 인간의 응답이다. 알고 보면, 지구는 한 편의 서정시다. 하늘과 땅은 매순간 변화하는 시의 보고(寶庫).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물론, 사물과 풍경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이다. 은유와 상징이다. 발견과 모험으로서 시는 나의 숨은 신()이다. 그런 자연은 빛과 색, 소리와 향기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인간 실존은 시를 통해 더욱 고통의 축제를 즐긴다. 당선의 기쁨이 큰 만큼, 내게 있어 좋은 비평과 시론에 대한 열망과 고민이 한층 깊어졌다. 심사위원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절치부심하겠다.

 

프로필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문학세계시 부문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